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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오후 4-5시.

영상 집담회가 끝나고 소화기 섹션 치프 선생님의 증례 환자에 대한 너무나도 친절한 설명을 들은 후,
EMR을 복사하느라 의국에 남아 모니터를 응시하는데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낯을 간지럽힌다.
정신없이 모니터만 보다가 그제서야 병원 밖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 나, 무슨 일인지 시끌벅적하다.
아 맞아 오늘부터 연건캠퍼스 축제랬지..
늦은 오후의 햇살과 내가 있는 공간 바깥의 밉지 않은 소란. 

어렸을 때 난 오후 4-5시 정도의 시간대를 좋아하지 않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중간한 오렌지빛의 하늘(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지만), 
낮게 깔려 넘어가기 직전인 태양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강렬하고 화려하지 않아서 맘에 들지 않았나보다. 

시각적으로 맘에 들지 않는 것 외에도 4-5시는 늘 엄마가 학교에서 퇴근해서 돌아오던 시간,
즉 오늘은 더 이상 밖에서 동네 또래들과 놀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더 싫었겠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아주 옵세시브하게 한 시기가 몇 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보는 4-5시의 하늘은 그 어린 걱정에 우울함을 한 층 더했기에 더욱 싫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난 이 어둠으로 넘어가는 시간대를 항상 학교 또는 학원에서 보내게 되었으므로
몇 년 동안은 그 오렌지빛의 하늘을 거의 보지 못하고 지냈다.
자연스레 싫은 감정도 사라졌고.

오랜만에 창 밖에 비쳐 보인 예전의 그 오렌지빛 하늘. 
물론 대학교 입학 후에는 수도 없이 봤을 석양이지만 오늘은 느낌이 특별해서,
앞에서 말한 어렸을 때의 기억과 함께 다른 시점의 감정이 하나 더 되살아났다. 
그건 바깥의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준 것으로, 2007년 5월 14일이 월요일이었던 주 어느 평일 오후에 느꼈던 감정이다.
그 전 주부터 과제와 각종 할 일이 밀려 있었지만 나는 주말을 꼬박 바쳐 더 중요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땐 정말 순수했나보다.  

어쨌든 주말을 희생한 덕분에 스스로 감정적으로 충만해졌지만 다음 주의 오버로딩은 막을 수가 없어서,
밖에서는 즐겁게 의예과 장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중앙도서관 5층에 앉아 복지국가에 대한 문헌 고찰을 했다. 
그때 느꼈던 복합적이고 미묘하고 형언할 수 없지만 두둥실 뜬 것은 확실한 그 감정.
바깥에 귀를 기울인 순간 오늘도 똑같이 되돌아와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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